2011년 9월 21일 수요일

팔괘장 노수전 八卦掌 盧水田 (2)

노수전 팔괘장 盧水田 八卦掌  (2)

또한 북경 이외 여타의 팔괘장도 존중한다. 중국의 팔괘장은 파별로 종류도 많고 내용도 다종 다양하다. 즉 파가 다르면 수가 다르고, 같은 파에서도 전승자마다 각양각색이니 아마도 전 세계적으로 수백가지 형태의 팔괘장이 있는듯 하다. 그런데 중국무술의 아름다운 미덕 중 하나가 선생이 전해준 수는 미련스러울 정도로 답습하는 전통이 있는데, 선생이 이러이러한 수를 전했으면 그 자체가 이미 전통인지라 그 제자가 그 수에 대해 맘에 들지 않는다고 바꾸는 경우는 생각해 볼 수가 없고, 단지 터득된 바가 있다면 원래 선생의 수에 보탤 수는 있다. 또한 팔괘장의 전승방식 이러한 전통에서 역시 예외일 수 없다. 그렇다면 선생이 전해준 그 전통이라는 수는 선생에 선생으로 거슬러 올라가면 그 시발은 동해천 조사로 부터 시작된 팔괘장 일것인 바 그렇다면 오직 한 종류의 동해천 조사가가 전해준 팔괘장만이 전승되어 내려오지를 않고, 그 많은 팔괘장의 종류가 존재한 다는 것은 수 많은 전승자들이 동해천 조사로 부터 전해져서, 그들의 선생과 선생이 전해준 전통적인 수를 개인적인 기호에 따라 바꾸었다는 말인데, 이것은 전통을 미련스러울 정도로 집착하고 답습하려는 중국무술의 전통적인 전수방식의 특징과 정면으로 위배되는 것으로 실제 있기 어려운 일이다.



실례로 탕랑의 한상열선생에게 다년간 탕랑을 학습한 적이 있는데, 탕랑은 왕랑선생이 탕랑문파를 열면서 전한 빠주를 비롯한 전통 수들의 매 초식의 초식명까지 변함없이 바뀌지 않고 권보로 기록되어 전해오며, 역대의 선생들이 선대의 권보를 필사하듯이 자기의 필체로 따로 기록하여 내려온 탕랑권보를 눈으로 확인한바 있다. 왕랑선생이 전한 수, 그리고 여러대 후에 양학향선생이 만든 적요 1~4단, 강화룡선생이 만들어 보탠 적요 5~7단, 그런 권보에 탕랑의 모든 수가 시작부터 마지막 수까지 순서데로 초식명이 적혀있어 가르치는 선생이 노쇠하여 기억이 가물가물 한 상태에서 가르친 것이 아니라면 탕랑은 근본적으로 수가 동일하다. 심지어 악가권은 탕랑 전통의 수는 아니지만 다른 문파의 권법을 초심자용으로 언제 탕랑문에서 받아들여 탕랑문의 권법이 되었다 라는 기록까지 권보에 기록하는등 전통을 매우 중시하며 이런 전통은 탕랑문파의 대단한 자랑거리라고 생각한다.



탕랑권이 이렇고 전통이 이러한데, 그렇다면 팔괘장은 왜 수도 없이 많은 종류가 존재하는 것인가? 생각해 보건데 그 이유는 동해천 조사는 현재 보이는 수 많은 종류의 팔괘장과 같이 조합적이고 정형화된 형태의 모습으로 된 어떠한 수를 전하지 않았을 거라는 사실이다. 고정적이고 정형화 된 수를 전하지 않고 원돌기나 원돌면서 구, 파보로 환장하고 방향바뀌어 돌며 임기응변적으로 변화되는 수들... 그리고 현재 보이는 팔괘장의 짜임새보다는 전투기술 위주의 단 수 형태 또는 좀 더 원시적인 형태의 모습으로 전했을 것이다. 또한 동해천 조사의 팔괘장이 고정적인 것이 아니었기 때문에 체격이나 신체 특성에 따라 조금씩 달리 전해줄 수도 있었을 것이고...
이런 의미에서 일점일획 틀림이 없이 왕랑선생으로 부터 현재까지 전해지는 탕랑권과는 달리 팔괘장은 팔괘라는 철학적 의미에 부합시켜서 팔괘장이니까 장술이 여덟개라는... 그래서 8종의 장술이 유행되지만, 현재 보이는 여덟가지의 장술의 동해천 텍스트는 처음부터 없었다는 결론이 도출된다. 동해천 팔괘장의 텤스트가 있기만 했다면 탕랑권과 같이 답습되어 이 문파나 저 문파나 품격은 다를망정 수 자체는 같았을 것이다.



그렇다면 현재의 팔괘장은 2대나 3대 제자들의 작품이거나 혹은 더 후대 이던지 아니면 비교적 근대의 조합적 작품인 것이다. 북경에서는 지근 거리에 상존하는 여러 유파끼리 서로 영향을 안 끼칠 수 없고, 많은 시범장소나 표연회장에서 우리 수도 발표하게 되면서 남의 수도 보고 그러면서 특징적인 요소는 최소한 지키겠지만... 그리고 서로 수 적인 영향을 주고 받으며 지금 현재까지 이르게 된다. 결국 어느집이 먼저 형틀을 갖추고 어느집이 늦게 형태를 갖추었냐의 차이일 뿐이다. 많은 전승자가 있다보니까 한개씩만 들고 나와도 열개가 되고, 열사람의 생각과 열사람의 각자의 깨달음적인 느낌이 있게 되므로 결국은 폭 넓고, 팔괘장의 본토다운 다양한 유파의 팔괘장이 전해지게 된다. 



돌아보건데 노할아버지의 팔괘장은 원을 돌아 내력을 기르고, 호흡에 맞추어 장력을 기르며 장술에 맞추어 신, 보법을 터득한 후에 팔괘장 단수 위주로 전투능력을 배양 하는것이 노할아버지 팔괘장술의 핵심이었다. 이미 다양하게 조합된 북경의 팔괘장에 비 한다면 다분히 원시적이고 척박한 환경과 토양이었다. 다시말해 등소평이 진가구를 방문해 "太極拳好"라는 휘호를 써주고 무술을 문화 관광사업으로 국가적으로 장려해 왔듯이 본토의 팔괘장은 시대적 변화에 탄력적으로 대응하여 외형적인 수의 변화를 일찌감치 겪었으나 홀로이 한국으로 넘어온 노할아버지나 그 후대들은 그러한 북경의 변화를 알 수가 없어 자기 혁신에 둔감하게 되어 오늘에 이르렀고, 전술한 바 데로 형틀과 형태를 갖추는 것이 먼저 갖추었다고 훌륭한 보증도 아니요, 더디게 되었다고 그 더딘 바가 그 누구들 보다 꼭 부족해서만은 아닌 것이다. 



둔감은 하였지만 그 둔감이라는 것이 무술적인 퇴보를 뜻 하는 바가 아님을 이해해 줄 수 있는 무술적이고 감각적인 소양을 지닌 사람이 읽고 공감이 가 준다면 더 할 나위가 없겠다. 나는 이 팔괘장이든 저 팔괘장이던 훌륭하면 훌륭한데로 부족하면 부족한데로.. . 부족하다면 자기의 공부를 보태고 남들은 한개씩 들고나와 열이 모여 열개가 된다면 그걸 부러워만 할게 아니라 내가 공부 열심히 해서 열개 만큼의... 아니 열개가 안된다면 안 될것도 전혀 없지만 버금가게 깨우치고 터득하고... 알고나면 팔괘가 뭐 별게 있겠는가... 나의 사부께서 옛날에 말씀하시듯 무술이 하늘을 나는게 있겠는가... 땅으로 꺼지는게 있겠는가... 노할아버지 팔괘가 본토 팔괘장에 비해 체계적으로 뒤늦고, 비록 수 적인 내용이 열사람 모인 곳 만큼 열 개는 안된다 하더라도 내 품격과 노할아버지 스타일은 지니고 있는 것이고, 노랑이면 노랑이고 빨강이면 빨강이지 주황색은 할 수도 없고 갈 수도 없는 길이다.


무술이 수가 많아 넘쳐나고... 그래야만 훌륭한 무술이 되는 선결조건은 아니다는 것은 어지간한 인사들은 다 알 것이다. 복싱에 팔괘장적인 신법으로는 바디 웤, 팔괘장적인 보법으로는 푸드 웤, 수법적으로 스트레이트, 어퍼, 훅... 더 뭐가 있나... 뭔 수가 그리 폭 넓고 많을 당위성이 존재하는가... 노할아버지의 수는 있을것만 있었고 그리고 그 것만으로도 많았는지 모른다. 아니 팔괘장이 원래 그랬는지 모른다. 나는 여기서 노할아버지와 북경의 팔괘장을 비교하고자 함이 전혀 아니다. 여러 훌륭한 팔괘권술가에 의해 본토의 팔괘장은 더욱 진보된 형태의 모습을 지니게 되었을 것이라 보고 있는 것이며, 그런 훌륭한 무술을 그 집안에 들어가 다년간 지도받고 학습하고 하여 그 문파의 문인으로서 그 제자도 선생을 지극히 존경하고 그 선생도 당연시 해주는 그런 아름다운 사제 관계는 진실로 존중하고 문파와, 나이를 더 먹고 덜 먹고를 떠나 진실로 존경한다.



단지 따로이 떨어져서 전해지게된 노할아버지의 팔괘장을 기십년 몸 담다보니 노할아버지 팔괘장에 대해 애틋한 마음과 그 팔괘장을 죽도록 지키려는 의지가 발현되어, 그 동안 느낀 바데로 노 할아버지의 팔괘장과 북경의 팔괘장을 연관지어 생각해 보는 것이고, 돌아보건데 문제는 내부적으로 인천에서 팔괘장을 했다는 사람들로 인해 오히려 외부의 인식에서 평가절하되는 일들이 있었던 것 또한 사실이다.



2007.11.9 毅林 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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