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21일 수요일

팔괘장 八卦掌, 나의 吾師 金相昊





吾師 金相昊

나의 스승 김상호 선생께서는 인천 숭의동이 고향이시다.
내가 태어난 집하고는 찻 길 하나 건너서 마주하고 살았었으니

아마도 사제간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이 되었는가 보다.

사부께서는 어려서 부터 중국무술을 배우고 싶은 열망으로
중학생의 어린나이인 관계로 중국무술을 가르치는 도장이 어디에 있는지도 몰랐지만

단지 중국인들이 모여사는 화교촌에 가면 무술을 배울수 있는 계기가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으로 부두노동조합에 사환으로 취업하여 낯에는 조합에서 일하고
밤에는 야간학교에 다니셨다.

그 곳에서 자연스럽게 중국인들과 친분이 맺어졌고 친구도 사귀게 되었으며
자연스럽게 노수전 사부라는 대단한 중국 노인네가 있다는 것도 알게 되어

노 할아버지의 딸(현재 미국에 생존)과 친분이 있고
노 할아버지 외손자의 시영 아버지 였던 김영철(피아노, 바이올린선생)씨에게
노 할아버지에게 무술을 배울 수 있게끔 해달라고 소개를 부탁하여
김영철씨 주선으로 노 할아버지와 딸, 노수덕선생, 김영철씨 까지 모여
제자로 받아들일 것 인가에 대한 가족 회의를 하였다고 한다 .


노수덕 선생이 약간의 반대를 하였지만 노 할아버지도 제자로 받겠다 하시고
노수덕선생의 누님도 찬성하여 노 할아버지의 제자가 되어 팔괘를 전수받게 되시었다.
해서 노 할아버지에게 평생 사제간의 도리를 다 할 것을 약속드리고
노 할아버지의 마지막 제자로 정식 입문하여 무술을 전수 받게 된다.

(위 사진의 위치가 부두 노동조합 옥상이며 노수전사부께 수련을 시작한 곳으로 수련 중
쉬는시간에 마침 카메라가 있어 노수전 사부와 기념사진 한장 남긴것이다)

그 때가 1967년도 이고 선생께서 중학교 2학년 15살 때이다.

노 할아버지에게 무술수업을 받던 중 어느 날
선생께서 노 할아버지의 아들인 노수덕 선생의 집에 다니러 갔을 때 역시 그 곳에 다니러 온
한국인으로서는 제일 큰 제자인 전대성 선생을 처음 보게 되었고
자연이 합석하게되어 노수덕선생의 소개로 인사를 나누었으며

그 당시 전대성 선생은 도장을 운영하기 전 이었고 그 후 신흥동 돌담 모퉁이에
도장을 개관하게 된다.

여하간 선생께서는 발군의 기량과 타고난 무술적 재능으로 노 할아버지의 귀여움을 독차지하며
무술을 배우셨고 그런 노 할아버지는 어린 제자를 귀여워 한 나머지
제자의 발 길이를 손 뼘으로 재서 꼭 맞는 중국 신을 구해 신겨 주셨으며
노 할아버지의 며느리 즉 노수덕선생의 부인이 중국 옷을 만드는 재주가 있어 며느리에게 부탁하여 

중국옷을 지어다 입혀 주셨다.

(아래 사진의 옷과 신발이 노 할아버지께서 지어다 입혀주신 옷인데 그 때가 1969년도 이다)




- 위 사진이 그 옷이고 장소는 아래에 언급되는 소사(현 부천 ) 의 모 도장이다.-


선생께서도 노 할아버지께 보답을 하고 싶었지만 집안 형편은 넉넉지가 않았기 때문에
중국 음식점에 배달부로 일거리를 얻어 월급을 모아서 노 할아버지께 금반지를 해 드리기도 하셨다.
방학 때는 노 할아버지 방에서 거의 매일 같이 잠을 자며 운동을 하셨고


노 할아버지도 할아버지와 손자 사이의 정 이상으로 어린 제자를 이뻐 해 주셨다고 한다.
또한 화교촌에는 화교학교 무술선생이셨던 피 할아버지(필서익 노사)가 계셨는데
선생께서는 노 할아버지의 수를 익힘과 동시에 피 할아버지의 수도 익혔으면 하셨는데

피 할아버지는 노 할아버지와 달리 한국인에게는 우호적이지를 않아
생전에 중국인 외에는 한국인 제자를 일절 두지 않았다.
해서 피 할아버지의 중국인 제자(왕 입국)를 친구로 사귀어
피 할아버지의 수를 친구를 통해 습득하게 된다.

그 때 익힌 피 할아버지의 수가
뚱푸, 얼절로, 판룽군, 빠기, 매화창, 싼환도, 칠절편, 매화도, 양가 태극권... 등이다

그 수들을 노 할아버지 앞에서 자랑삼아 뛰면 노 할아버지는 고개를 좌우로 흔들며
역정을 내셨다고 한다.

그 때 쯤 전대성 선생이 신흥동에 도장을 개관하게 되어 운동할 장소가 마땅치 않았던
선생께서는 노 할아버지에게 배우면서 선배이기도 한 전대성 선생의 도장에 새벽에 나가서 
운동을 하셨다고 한다.

그리고 그 당시 어린 학생들 열 댓명이 모여 용돈을 모아 노 할아버지께 드리고
노 할아버지의 사위가 운영하였던 중국 음식점인 대려춘 옥상에서
운동을 배우던 일이 있었는데 약 6개월 정도 지속되다가

노수덕 선생이 노 할아버지에게 학생들을 지도를 못하게 하는 바람에
그 학생들은 노 할아버지의 부탁으로 나의 선생에게로 와서 운동을 지속할 수 있었으며
후일에 나에게는 선배가 되는 인연이 되게 된다.

그 때가 1970년도로서 그 선배들이 중학교 3학년 16살들 이었으며 그 중의 중심인물로는
채장석 선배, 박성진 선배, 서춘원 선배 등이 있다.

선생께서는 노 할아버지를 대신하여 사시던 집 뒤편의 공터 겸 창고에서 
중국무술 용화문이란 간판을 내걸고 그 선배들과 같이 가르치며 수련을 하셨다.

이 때가 1971년도로서 그 자리에서 약 3년정도 도장을 운영하시게 된다.
그 와중에 김OO라는 사람이 소사(지금의 부천)에 도장을 개관하자
노수덕 선생이 실력을 문제 삼아 간판 내리라고 노발대발 하였는데

나의 선생께서 소사도장에 관장으로 취임하는 조건으로
도장 문 닫게 된 것을 모면하게 해 주신 일도 있었으며

그런 연유로 노 할아버지를 자주 모시고 소사도장에 가셨다고 한다.


이 후 공군에 입대하였는데
일등병때 부대 내에 있던 태권도 도장을 간판을 내리게 하고 그 자리에 중국무술 
도장을 열어 군간부들과 그 자녀들을 가르쳐 당시 전우신문에 대서특필 된 바 있다.




일개 공군 사병이 기존의 태권도 도장을 밀어내고 십팔기 교관이 되어 전우신문에 보도가 될 
정도인 것은 우리로서는 상상하기조차 힘든 대단한 경력이다.

이 때 공군 부대장의 추천서를 갖고 삼장법사 일붕 서경보 큰 스님의 제자가 되기 위해
서경보 큰 스님을 뵈었을 때 " 체구도 작고하니 뭔 무술을 하겠나 " 하는 눈치 였을 때

선생께선 절간 마당에서 옷을 벗어 제치고 한바탕 시범을 하였더니

서경보 스님께서 버선발로 뛰어 내려와 " 이게 도데체 무슨 무술인고" 하고 크게 반겨했다는
일화는 선생께서도 나에게 자랑삼아 가끔씩 해주던 말씀이시다.


군 입대 이전에 선생께서는 노 할아버지께 전수받은 팔괘장과 자연스럽게 몸에서
흘러나오는 자신만의 무술과 서경보 큰 스님을 통해 익힌 禪을 통해
스스로의 무술을 창안하기 위한 밑그림이 그려지던 시기 였는데

이미 노 할아버지와 대사형 이었던 노수덕 선생에게는
한국인으로서 새로운 무술의 길 을 가겠으니 허락해 달라하여
노 할아버지와 노수덕선생의 이해와 인정을 받았는데

이 때가 1973년도 21살의 나이셨으니
어찌되었거나 참으로 대단하신 분이 아닐 수 없다.

제대 후에는 김포에 도장을 차려 2년 운영하시다가
1979년 제물포에 도장을 설립하시고 스스로 창안하신 圓身무술과
팔괘장을 5년간 지도하셨다.
이 후에는 내가 선생의 뒤를 이어 후진을 양성해왔고
선생께서는 개인적 수련과 사업에 전념하시어 경제적으로도 어느 정도 이루셨고
92년도에는 인천 남동구 구의원으로 당선되시어 의정활동도 하신바 있으시다.
최근에는 인천광역시 우슈협회 회장에 취임하시어
인천 우슈 발전을 위해 앞장을 서시게 되었는데



<2010.10.24. 좌로부터 김상호 사부님, 강영재 선생, 유순화선생 ,상신전선생>


내 입장에서는,
간간히 우슈협회의 동정을 들었던 터라

이전투구장 같은 우슈협회 일에 나서시는 것을 반대하였으나
주변 팔괘장 후배들의 간곡한 권유로 인해 인천우슈협회의 큰 업무를 맡아 쥐셨으니

나의 생각에도 인천 쿵후계의 최고 원로로서
후배들이나 인천 쿵후계의 발전을 위해 한번쯤은 나서시는 것도
보람찬 일인 것으로 생각한다.

끝으로 이런 글이나 우리 집안의 내력 따위에 관심없는 사람은 이 글을 안 읽어 주었으면 한다
그런 사람을 위해 장시간을 할애하여 쓴 글이 아니고
이 글을 보면 " 아 뭔 말을 하려는구나" 하고 알아차릴 소수를 위해 쓴 글이기 때문이다

내가 잘 알지도 못하면서 과거에 들었던 기억을 되짚고
감히 선생의 과거를 들추어 "나의 스승 김상호"란 제목으로 글을 쓰게된 연유는

진실은 항상 세월속에 묻히는 것이 세상사이므로
인천의 대 선배란 사람들이 진실을 진실로 말해주지 않았던 까닭에
그 후인들은 그 왜곡된 사실을 진실인 양 받아들이고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노 할아버지와 나의 선생간의 사실적 관계를 년도별로 정확히 표시한 이유다

사실 노 할아버지의 제자 중 중국인을 제외한 한국인 제자들은
노 할아버지와의 사제간의 사실관계에 있어 명료하게 마음 편할 사람은 한 사람도 없다.

또 내가 이런 부분까지 논 하려한다면 책 한권은 엮어야 할 판 이므로 줄이고 줄여서 쓴 글이다.
하지만 어차피 40년도 한참 지난 과거에 연연할 이유는 없고
단지 선생과 노 할아버지와의 진실된 사실을 간단하게라도 말하고 싶었을 뿐이다.

내가 선생의 문하에 들어 중국무술을 익히면서 그 때, 그 때 보아온
선생의 무술적 기예는 감탄과 감동 그 자체였다.
흉내 내기 조차 어려운 그 무술적 감동은
내가 한참을 열심히 했던 어릴적에도 쫒아 갈 수가 없었다.

지금도 절반이라도 따라할려는지는 장담할 수 조차 없다

나는 그러한 비범한 무술의 경지가 노 할아버지로 부터 이어져 온다는 그런 가슴 뿌듯함에
자부심과 자존심으로 살아왔으며 그 기백으로 한국 팔괘장 보존회를 이끌고 있다.

나를 이정도 나마 중국무술에 이르게 해 주신
사부님께 감사 드린다



盧派 八卦 傳人 張毅林 書



<원문>

한국 팔괘장 보존회 

운동 문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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